노오처사 묘갈명 병서 (영회정공파 20세, 남원시 대강면 수홍리)
노오처사 묘갈명 병서 (영회정공파 20세, 남원시 대강면 수홍리)
옛 선비들이 말한 것이 있는데 효도가 증자와 민자건과 같을지라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는 것은 위선이라 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진실한 마음으로 효도를 하고도 사람에게 알리려 하지 않은 사람은 노오처사 오공이 아닌가 한다.
어려서부터 매우 착한 성격으로 뜻과 몸을 함께 길렀는데 아버지가 강의 생선을 좋아하니 십리거리에 적성강으로 가
덤풀 속에서 호리병으로 비록 얼음을 깨고서라도 반드시 생선을 잡아다 드렸다.
어머니가 쓴나물을 좋아하니 한가한 날
질펀한 언덕으로 가 광주리와 거에 채웠으며 비록 눈이 쌓여 그것이 없어도 그랬다.
종족과 이웃사람들이 가상하다 말하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얼음속의 잉어와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하고
이러한 사실의 글을 부에 천거하였는데 공의 나이 10세때라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중략)
공의 휘는 식이고 자는 윤화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고려 좌복야 휘 광휘 시호 문도가 공의 시조다. 두암 선생 시호 문충 상덕과 화산거사 치행은 천관경이 증직되었다.
금남재 응은 대제학이고 영회정 찬조는 절도사인데 충의의 공적이 현저하였다.
고조 규는 호를 괴헌이라 하였는데 문행이 있었다. 증조는 도제이고 조는 명권이다.
고는 한겸인데 호는 수헌이라하였다. 전비는 밀양 박씨 이경의 따님이고 후비는 광산 김씨 천표의 따님이다.
공은 김씨에서 태어났으며 순조 31년(1831)태어나 고종광무6년(1902) 뛰어난 노인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이 해 6월26일 삶을 마치니 대강면 수홍리 아미치 신원에 장사하였다.(중략)
학산 재열공의 종생들이 일찍이 공의 지극한 행실을 칭찬하고 또한 이르기를
광열이 씩씩하여 굴하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고 하여 평소에 찾아와 서로 사귈것을 갈망하였으며
나와 서로 가까이 살면서 다시 업드려 비석에 새길 것을 청하였는데 사양할 말이 없어 허락하였다.
명하여 이르노니 오씨는 천령(함양)을 이어옴에 복야군을 시조로 한다. 선덕과 명환이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어지고 이어져 두암공과 화산공, 금남재공과 영회정공이다.
괴헌공과 수헌공도 그 풍채를 유지함이 아니겠는가.
공의 타고난 효순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음이라.
눈 속의 나물이요, 얼음속의 고기네. 부모님의 밥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효행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두루 화목함이 바꾸지 않았다.
산 좋은 물 맑은 곳에 집을 짓고 노후를 마쳤네.
세간사를 오동나무 달 아래에서 즐겁게 근심을 잊어버림이라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은 것은
고금에도 없는 사람이라. 도연명과 같은 사람으로 전할 것이며 욕심없는 백성으로 가슴에 품으리라.
순정후 오주 신해(1911) 행주 기우만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