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모습

남원 몽심재

고향사랑1 2017. 11. 30. 21:12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위치한 몽심재

이야기만 듣고 찾아 보지 못했던 몽심재를 찾았다.

돌담의 정취가 다정다감하게 다가오고

대문을 바라보니 좌우 대칭이 맞지 아니하여 왠지 부조화의 느낌이 든다.


 


대문 입구의 안내판


 

 


몽심재를 세운 이는 박문수의 16대손인 연당 박동식(蓮堂 朴東式, 1763~1830)이다.

죽산 박씨가 남원에 들어온 것은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朴子良) 때다.

한성 판윤으로 있던 박자량은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전라 관찰사로 좌천되어 내려왔다가,

처가(남원 양씨)가 있던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초리에 눌러앉았다.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산 박씨는 현재의 수지면 호곡리로 집단 이주하여

죽산 박씨 씨족 마을을 이루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몽심재의 주인은 박동식-박주현-박해창으로 이어진다.

만석군 박해창의 둘째아들이 원불교 상산 박장식교무(1911~2011)이다.

이후 원불교에 죽산박씨의 많은 분들이 출가하였고

박제권, 박성기, 박청수 이분들이 이곳 출신이다. 


 


사랑채인 몽심재

사람키만큼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랑채의 계단 수가 많을수록 그 집의 품격도 비례해서 높아진다고 생각하였다

몽심재가 남원 인근에서 회자된 것은 과객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도 남원은 구례,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보니

몽심재는 자연 구례, 순천 쪽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들르는 단골 사랑채가 되었다.

 대접이 후해서 선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고.


 


몽심재의 몽과 심자는

송암 박문수의 시중에서 끝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隔洞柳眠元亮夢(격동류면원량몽)
登山薇吐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


마을을 등지고 잠든 수양버들은 도연명(元亮)을 꿈꾸는 듯하고
산속의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듯하다.


송암 박문수는 고려 말 조선을 반대하고 숨어든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고

박문수의 후손이 이곳 수지면에 정착하였다고



 


안채로 올라가는 중문채


 


ㄷ자 모양의 안채


 


대문 좌측에 위치한 연못(천운담)


 

 

 



죽산 박씨 종가는 몽심재 바로 옆에 있다.



 


삼강문

삼강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종가 사랑채


 


종가 안채


 


충현공(忠顯公)박문수(朴門壽)를 배향하는 부조묘(不祧廟)



 


박문수의 불천위(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가 모셔진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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